♡영화와 함께...

[스크랩] [영화] 피오릴레

cecil-e 2006. 5. 14. 01:17

영화는 아이가 곤히 잠든 얼굴에서 시작된다.

끝없이 달리기만 하는 자동차 여행이 아무래도 잠들기엔 불편한지,

아이의 표정은 불편한 꿈이라도 꾸는 듯 아주 불안해 보인다.

그 얼굴을 일정한 간격으로 훑고 지나가는 터널 속의 붉은 암등.

 

생각해보면, 이 첫 장면에서 클로즈업 된 소년의 이미지속에

영화의 대부분이 함축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물론 뭐 해석하기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이니 무시하고 지나가시도록.

 

 

제각각 하나의 영화로도 됨직한 네 편의 비극이 한 영화 속에 버무려져 있다.

(가장 바깥 구조인 아이들의 이야기까지 포함해서.) 

다행스럽게도 아이들의 아버지는 끼있는 이야기꾼이고, 아이들의 상상력은 놀랍도록 풍부하다.

아버지의 내러티브가 영화의 바깥구조, 가장 큰 프레임을 만들어주고 (탄탄하고 지루하지 않다.)

아이들의 상상력이 그 안에서 좀 더 오밀조밀하게 각각의 이야기들을 재현시킨다.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데 컷을 나누지 않고 자연스럽게 처리한 것도 멋지지만,

그 시선의 이동이 차를 타고 가는 아이들의 시선이라는 점이 더 멋졌다.

'웅장한 음악과 함께'라는 아빠의 설명에 '록 콘서트처럼 말이죠?' 라고 되묻는 남자아이,

한 번 본 적도 없지만 왕자님같은 프랑스 군인을 상상해보는 여자아이.

아이들의 질문 속에 연회가 되살아나고, 창문을 내리고 바라보는 들판 속에 왕자님이 걷고 있다.

 

 

네 편의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동일한 장소, 토스카나 지방의 아름다운 풍경은

각각 다른 이야기들이 한 집안에서 일어난 일임을 시각적으로 확실하게 인식시켜 준다.

또한 같은 운명을 타고난 인물을 같은 배우가 연기함으로써

(엘리자베타와 그의 오빠, 쟝은 각각 1인 2역을 소화한다.)

대를 이어 되풀이되는 비극이라는 의미를 좀 더 분명하게 각인시켜 준다.

 

 


첫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인 쟝과 엘리자베타.

 


피오릴레. Fiorile


프랑스의 나폴레옹 군대가 유럽을 호령하던 시절, 길고 긴 행군을 하며 몇 번이고 새로운 봄을 맞이하는 군사들은 행군 중에 맞이하게 되는 새 봄의 기간을 피오릴레라고 이름붙였다.

(사전적 의미로는 '들판의 꽃, 야생화'라고 한다. -글쓴이)
그 중 1개 부대가 이태리 토스카나 지방을 지나가게 되면서 모든 사건의 발단이 마련된다.

발단이 되는, 그 첫번째 이야기만 줄거리를 공개한다. 

이 영화를 보실 분들은 줄거리 부분을 점프해서 넘어가시고, (당장 가서 보시라! 별 오백만개!!)

그냥 뭐 땡기진 않는데 궁금하긴 해, 하시는 분들만 읽으시길 바란다.

...읽고나서 읽은 걸 후회하셨으면 좋겠다. "젠장, 그냥 가서 볼껄!!" 이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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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전설, 쟝과 엘리자베타>

 

시대가 시대라서 그런지 슬픈 동화같다.

개인적으로는 토스카나의 풍경과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꿈같은 이미지라서

 

영화 속 부대는 황금 한 상자를 운반하는 중책을 맡고 있었다. 정확히는, 쟝이라는 장교가 황금 상자를 실은 노새를 끌며 부대를 이끌고 있었다. 쟝은 많이 따뜻해진 햇살때문에 행군을 잠시 쉬기로 하고, 근처 저수지 옆에 여장을 풀었다. 병사들이 무장을 완전해제하고 물 속으로 첨벙청범 들어갔을 때, 이탈리아 지방 귀족들의 기습이 시작되었다. 옷도 걸치지 않은(바지는 입고 있었다- - 젠장, 말도 안돼. 물에 들어가는데.) 프랑스 병사들은 고스란히 당했고, 급하게 총을 챙겨든 몇몇의 병사들이 대응사격을 해보지만 역부족이었다. 급히 노새를 숲 속에 피신시켜 놓고 쟝도 전장으로 뛰어가려 했다. 그러나 노새 때문에 한 발 늦었다.

 

한 발 늦은 것이 다행이었을까 불행이었을까.

쟝의 눈에 들어온 것은 쓰러져 있는 엘리자베타. (동화가 아니다! 난 분명히 영화를 보았다!)

쟝은 전쟁이고 뭐고, 숲속의 미녀에게 정신을 홀라당 넘겨주고 말았다.

 

엘리자베타는 인근 마을에 사는 농부의 딸로, 숲 속에 버섯을 따러 들어왔다가 기습부대의 총알이 허벅지를 스치는 바람에 기절해 있었다. 처녀의 치마 언저리에 피가 배어있는 것을 보고, 쟝은 자신의 허리띠를 풀러 허벅지 위 쪽에 지혈대를 만들어 주었다.

낯선 남자의 향기... 가 아니라; 쟝의 손길을 느낀 엘리자베타는 정신이 들고... 말이 통하지 않는 그들은 바디랭귀지와 표정연기로 우야무야 하는 동안에 서로 반해버리고 말았다. (다리를 다친 게 오히려 고마웠을 테지.)

 

둘이 천국에 있었을 무렵, 노새의 운명은...

 

엘리자베타의 오빠는 총소리가 잠잠해진 후, 숲으로 나간 여동생이 걱정되어 숲을 뒤지고 다니다가 쟝의 노새를 발견한다. '작년에 집나간 우리집 노새가 돌아왔다고 치자.'는 말도 안되는 생각에 합리화를 진행시켜 그 노새를 이끌고 집으로 간다.

저녁 때가 되어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생각난 엘리자베타가 급히 마을로 떠나고, 쟝은 그제서야 노새가 없어졌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 다음날 동이 뜰 때까지 노새와 금화를 되찾지 못하면 총살당할 처지에 놓인다. 마을에 이런 사정이 알려지고, 쟝은 마을 공터에 홀로 남겨져 밤새 노새와 황금을 기다리게 된다.

 

끝날 것 같지 않던 밤이 끝나고, 당연히 노새는 돌아오지 않았다. 쟝은 밤새 엘리자베타에게 쓴 편지를 품은 채, 자신에게 허락된 마지막 아침을 맞이한다.

쟝은 가장 절친한 전우이자 충실한 부하의 손에 엘리자베타에게 쓴 편지를 맡긴다. 그리고, 서너 발의 총성 속에 그는 저세상 사람이 되고 만다.


쟝의 편지는 엘리자베타에게 전해진다. 프랑스어를 모르는 그녀의 가족들과, 그녀는, 넋 나간 듯 앉아서 병사가 읽어주는 쟝의 편지를 전해듣는다. 쟝은 그 편지 속에서, 엘리자베타를 '나의 피오릴레'라고 부른다. 자신의 탐욕이 여동생의 사랑을 죽게 내버려뒀음을 알고 오빠는 사색이 되고, 그걸 묵인한 가족들은 모두 말이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도록 내버려둔 살인자가 오빠인 줄 모르는 그녀는 불같이 복수를 다짐하지만, 그 복수의 대상이 오빠라는 사실은 모른 채 쟝의 아이를 낳다가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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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사랑은, 사랑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비극으로 끝나버렸다.

그 후로 베네데티 집안은 훔친 황금을 착실히 불려나가며 이탈리아 전체에서 내노라하는 부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엘리자베타의 못다한 복수에 대한 염원과 오빠의 황금에 대한 탐욕은, 쟝과 엘리자베타의 전설같은 러브스토리와 함께 후세들에게 전해진다. 베네데티 집안은 말레데티(저주받은 인간들)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대를 이은 위험한 사랑과, 비극적인 결말을 되풀이 하게 된다.

 

과연 황금이 낳은 저주일까, 아니면 유난히 위험한 사랑을 즐기는 집안내력일까?

할아버지를 만나고, 그러니까 전설의 실체를 만나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는 차 속에서 남자아이는 손 안의 황금을 살며시 꽉 쥐어보고, 여자아이는 서리가 낀 차 창문에 손가락으로 피오렐리라고 써본다. 여자아이는 전설과 할아버지의 사랑을 어렴풋하게나마 사실로 받아들이고 알듯 말듯한 슬픔을 느끼는 반면, 남자아이는 모든 이야기가 그저 흥미로운 전설이나 동화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손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노란 동전만을 바라본다.

 

그들 집안의 전설은, 한낱 이야기일 뿐인 전설이 아니다.

게다가 그들 집안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사랑만을 위한 사랑과 부에 대한 욕심이 한 집안에 공존하기란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베네데티 집안의 전설은 현재 진행형이고, 어느 시대든 어떤 세상이든 계속 되풀이되는 것이 당연하단 생각이 들었다.

언뜻 보면 신화나 동화같지만, 한편으론 너무나 인간다운 비극이라서 누군가

'셰익스피어의 또 하나의 비극을 보는 기분'이라고까지 말한 것에 공감했다.

 

 

 

구체적인 장면에 대한 감상을 말해본다면-

 

나는 아직도 엘리자베타가 칼을 쥐고 울부짖으며 집을 뛰쳐 나가는 장면을 잊지 못하고 있다.

쟝의 편지가 읽혀지는 동안,

황금을 숨긴 오빠와 묵인한 가족들의 침묵과 엘리자베타의 동공이 풀린 표정,

복수심으로 가득 차오른 몸을 스스로 어쩌지 못하고

눈부시도록 꽃이 만개한 들판을 죽일듯이, 꿈꾸듯이 달렸던 엘리자베타.

 

두번째 이야기의 엘리사와 엘리오가 주고받던 눈빛과,

이 천재감독들이(따비아니 형제의 작품이다. 소개가 늦었나^^) 설정한 숨막히는 조명* *

정말이지 두번째 사랑 이야기는 대사가 없어도 괜찮을만큼 기가 막혔다.

의상, 조명, 음영의 톤, 색감 등등 온갖 시각적 효과만으로도 턱이 다물어지질 않는다. 

 

세번째 마쓰모의 이야기는 '살아남은 자가 견뎌야 하는 시간'이라서 더욱 슬프다.

내겐 가장 피부에 직접적으로 전해지는 비극이었다.

죽지도 못하고, 그 긴 시간을 혼자 삭히고 누르며 미친 사람인양 살아야 하는.

모든 비극과 슬픔을 혼자 가누며 자기가 마지막이길 바라며 살아온 그의 노년이

다른 이야기들과 비교해 가장 인간적이었다고나 할까.

이것도 역시 내 주관이겠지만.

 

 

 

영화를 보면서 김빠질만한 스포일링은 요리조리 다 피해갔다.

중요 장면은 입뻥긋도 안했고, 예상못한 유머도 곳곳에 숨어있으니 영화를 직접 보고 즐기시라.

이 정도 사전지식쯤은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을 거라 본다.

 

가을의 문턱에서, 안 그래도 충만한 감성을 철철 넘치게 하는 건 아닌가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 영화는 꼭 추천하고 싶다.

 

난, 또 보러 간다. 다시 보고 나서 감상평을 또 쓸지도 모르겠다.

출처 : vingt deux
글쓴이 : bretttear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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