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방을 챙기고 일어서는데 바람이 너무 불었다.
펄럭이는 커튼을 잡다가 선반위에 나란히 앉은
선인장이 와르르르~ 순식간에 거실 바닥이
마른 흙으로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쏟아졌다.
문을 닫고 가방을 내려놓고, 엎어진 화분들을 바로 세우고,
흙을 비질하며 주워 담는데 땀이 나고 짜증이 났다.
수업시간은 다가오는데 이게 웬일이람...
아이한테 문자를 넣고 다시 원상태로 정리하는데
30분이나 소요됐다.
바짝 마른 흙 속에 뿌리를 내리고 초록 가시를 두른 선인장!
한 번도 가시에 찔려 본 적이 없는데...
오늘 급한 마음에 여러 번 찔리면서 선인장 가시가
이렇게 따가운 줄 처음 알았다.
티슈를 여러 장 구겨들고서 겨우겨우 주워 담고
흙을 꾹꾹 누르면서 짜증이 났지만 마른 흙 속에서도
초록의 힘을 내는 선인장이 참 대견했다.
가르치는 아이가 그랬다.
선인장은 사막에서 모래에게 그늘을 만들어 주려고 자신이
희생하며 서 있는 것 같다고... 그 말이 생각났다.
친구는 내가 아침 내내 선인장과 씨름해서 수업도 늦고,
땀도 흥건히 내서 열 받으며 걷는다고 했더니 대뜸 그런다.
"임마, 난 매일같이 선인장 가시에 찔리면서 사는데...
넌 행복한 줄 알아...선인장 가시가 아픈 줄 이제 알았단 말야?"
그 말에 가슴이 쿵~했다.
정말 그랬다. 친구는 매일이 그랬을지 모르는데...
난 이제야 찔리면서 뇌리로만 알았던 선인장을
오늘에서야 바로 보게 되었으니...
생각해보니 고마운 일이었다. 또 다른 깨달음을 얻었으니...
.
.
햇살은 내리는데 바람이 참 시원했다.
엇 그제 입추가 다녀가서 그런 건가?
'더위가 어디로 간 거야~ 맥을 못 추네~'
바람 부는 날의 걸음걸이는 경쾌해졌고,
난 오후의 스케줄을 짜면서 힘을 냈다.
뭐든 밀었다가 왕창하는 버릇이 있어서
오후 수업 후 전시회를 두 군데를 잡았는데
예지를 기다리다 두어 시간 딜레이 되었다.
시간은 이미 늦어 버렸고...
결국 갈까 말까 망설이다
동생상미와 수지의 보챔으로 맨 얼굴에
입은 옷 그대로 무거운 책만 빼놓고서 나갔다.
배가 고파서 크라운에서 빵 몇 조각 사들고
우린 전철아래 의자에서 나눠먹고 덕수궁부터 갔다.




‘피카소에서 백남준까지’ 그이가 준 몇 장의 티켓!
날짜를 놓칠까봐 서두른 건데 이해 안 되는 부분들이 좀 많았다.
예술의 경지가 어디까지인지는 모르지만 흠뻑 와 닿는 부분은
별로 못 느꼈다.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작품들의 세계 속에서
머무르다 정말 후루룩~ 40분 만에 다 돌은 것 같다.
푸생에서 마티스까지나 샤갈은 달랐는데...
그래도 획기적이고 섬뜩한 작품의 세계 속에 또 다른 색감과
창작의 아이디어는 가슴에 담아왔다.






덕수궁 계단을 내려오다가 화사한 듯 수줍게 피어있는 배롱나무에
가까이서서 사진 두어 장 박고, 풀어진 레이스처럼 바람을 타는
꽃잎을 매만져 주면서 말을 걸었다.
'네가 백일 동안 피는 목 백일홍이구나...9월까지 피어 있을 거지?'

아카시아 잎처럼 흙 바닥에 노랗게 내린 꽃잎들을 보다가
그 나무이름이 회화나무임을 알았다.
좀 특별한 느낌이어서 궁금했는데 양반집 서원이나,
학자, 권세 있는 집안에서만 심었다던
그 회화나무임을 알고 나니 궁금함이 풀려서인지 기분이 좋았다.
교보로 가면서 일민 미술관도 들리고 싶었지만
시간이 늦어질 것 같아 서둘렀다.
수첩에 적었던 김기찬님의 사진집을 보면서 골목안의 풍경들에
푹 젖어 있다가 여러 가지 익숙한 물건들에 대한 애착이 꽃처럼
피어올랐다. 메모를 하고 삽화를 그리다가 소로우를 찾아갔다.
8번 구석진 맨 아랫자리에 가방을 내려놓고 신발도 벗고 주저앉았다.
니어링과 소로우가 여기에 폭~숨어 있었구나...
절판되어 겨우 양장본으로 하나 남은 '소로우일기'를 집어 들고
또 딱 한권 남은 '가을의 빛깔'도 챙겼다.
왜 이렇게 가슴이 벅찬 거야...
생각 같아선 모두 들고서 카드로 찍~긋고 싶었지만...
욕심을 덜어내고 30 여분 소로우만 만났다.
'앞으로 이 자리로 와서 머물러야지...'











인사 동까지 걸었다.
스파게띠야에서 상미가 과외비 받은 걸로 저녁을 샀다.
먹고 통인에 앉아 외등아래 빛나는 나뭇잎들의 소리를 듣다가
쌈지 길까지 거닐었다.
너무 오랜만에 나가서 그런 가 외국에 온 것처럼 가게들이 참 예뻤다.
불빛과 유리윈도우속의 정경들..속삭임...
얼마나 갖고 싶은 게 많은지 말야...고개를 돌리고 또 돌렸다.

'안네의 일기' 와 앤서니브라운을 만나려면 금요일이 바빠질 것 같다.
남은 건 그대로 미뤄두고...서둘러 걸었다.
발도 아프고, 기운도 없고, 졸립고...
그래도...
혼자 있는 예지 줄 고구마크림 빵을 들고 오면서
넉넉한 하루를 보냈음에 기뻤다.
내일 일이 밀렸지만 오늘은 빨리 자야겠다.
빨리 자도 2시지만...
오늘...
순전히 바람불어 좋아서 오랜만에 여름 나들이 했네~
아함! 오늘도 바람이 시원해서 이불을 꼭 덥고 잠들 수 있겠다.
.
.
내 마음속에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그분은 아신다.
당신께 어떤 생각을 드리는지 챙겨주시리라 믿는다.
모든 걸...다 맡긴다.
내일도...
오늘처럼...고마운 하루가 되도록 당신께 기도드리며 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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