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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영희 선생님께.
평안하신지요?
“사람은 해질녘이 좋아야 해!”라고 촌로들께서 말씀하십니다.
젊어 고생해도 늙마가 편안하면 좋다는 뜻이지요. 살아오신 내력의 참됨으로 인생이 아름답게 노을져야 한다는 건 제 해석입니다.
선생님의 <대화>를 읽으면서 유감없이 장엄한 저녁 노을을 마주한 기분이었습니다.
“부끄럽지 않다!”고 회고할 수 있는 인생이 흔치 않은 듯 싶습니다. 젊어 고생한 자취에 어리석은 노욕으로 오물을 끼얹기도 하고, 어지럽게 찍은 발자취에 입에 발린 참회와 달관으로 분칠하는 수작도 흔히 봅니다.
내 앞에 던져진 현실상황을 묵인하거나 회피하거나, 또는 상황과의 관계설정을 기권으로 얼버무리는 태도를 ‘지식인’의 배신으로 경멸하고 경계한다셨지요? 사회에 대한 배신일 뿐 아니라 그에 앞서 자신에 대한 배신이라고 여겨왔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살아오신 것이 고맙고 죄송스러워서 내내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하며 다 읽었습니다.
<장자>의 포정(疱丁)은 죽은 짐승의 고기와 뼈를 솜씨 있게 다루었다지요? 당신의 평생은 살찐 권력의 비계와 살아있는 우상의 껍데기를 발라내는 일이셨습니다. 우상의 저주와 힘센 짐승의 패악이 아이들 말로 장난 아니던 시절을 이성의 펜대를 칼로 삼아 싸워 오셨습니다. 그렇게 발라주신 살코기를 날름날름 받아 먹으면서 정신적 미숙을 자인할 수밖에 없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가난하고 철부지 아이들이 많은 흥부네 집 같은 우리 현실을 지켜오셨습니다.
가난하고 철부지 아이글이 많은 흥부네 집같은 우리 현실을 지켜온 당신.
외로운 것이 인생이라, 누구의 호의나 힘에 의지하지 않고 살아온 당신.
어미 진돗개처럼 살아온 당신.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집 지키는 개처럼 사셨지요? 객이 오가는 동정을 주인에게 알리되, 객들의 속마음을 읽어 때로 거칠게 으르렁대고 때로 눈을 맞추며 꼬리를 흔들어 주셨습니다. 영특한 진돗개가 그런다지요? 속내를 들킨 허울만 번지르르한 손님이나 사나운 도둑들의 욕설과 발길질인들 왜 없었겠습니까? 개밥그릇을 차 던지고, “개 좀 묶어!” 소리치고, 혼비백산하여 봉당 위로 뛰어 달아나는 정경이 눈에 선합니다. “복날 잡아먹자!” 하는 소리도 남들 안 듣게 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비유가 너무 예의 없었습니다. ‘겨레와 사상의 스승’이라는 표현도 좋지요. 더 긴 존경의 수식을 당신의 이름 앞에 붙여드리고 싶은 심정은 저도 마찬가집니다. 다만, 그 영특한 어미 진돗개 곁에서 멋모르고 따라 짖는 아직 여리고 서툰 새끼 진돗개가 되고 싶다는 뜻이었습니다.
- 외롭게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누구의 호의나 힘에 의지하지 않고 그저 나 혼자 하는 것이려니 하는 정신자세로 살았노라고 하신 대목도 읽었습니다. 높은 산정에 서면 마음 그리 허전할 수 있겠다는 짐작만으로 당신 곁에 있고 싶어지는 젊은 마음을 헤아릴 수 있으신지요? 당신의 그 외로움에서 오히려 힘을 얻게 된 심정도 다 아실 줄 믿습니다.
당신의 도저한 행적을 따라 읽으면서, 사실은 자책과 함께 깊은 낭패감도 있었습니다. 세상을 읽는 식견, 사람을 보는 안목, 신념, 열정, 너그러움에 글 솜씨까지, 어느 것 하나 당신을 따라잡지 못할 범재들이면 누구나 품음직한 절망이고 자괴가 아닌가 합니다.
당신은 그림 그리는 솜씨도 부러운 일이라시고, 피아노 한 가지쯤 못 익힌 각박한 삶을 아쉬워하시지만, 민족의 명운과 나라의 존망을 지키는 일과는 애당초 견줄 일이 아닙니다.
이제 이쯤 왔으니,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과거의 중압에서 벗어나서 대화·융합을 생각하라셨지요? 아픈 자기 성찰과 자기부정 위에서 다시 시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야지요. 당신 말씀처럼, 묵인도 회피도 말아야 하고 기권은 더구나 안 될 일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자신에 대한 배신’은 차마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회고록을 유치한 독법으로 다시 읽습니다. 책의 본줄기를 잠시 접고, 누구나 흉내낼 수 있을 법한 당신 삶의 원칙과 신조를 가려보았습니다.
-화투, 짓고땡, 고스톱, 바둑, 트럼프, 마작, 골프, 복권, 돈내기 오락, 경마 따위는 성에도 안 맞고 인생철학에도 위배되어 가까이 않고 산다.
-정치인, 군인, 정부고관, 실업가 같은 사회적 지배계층에 속한 인사들과는 ‘친교’를 맺은 일이 없었다.
-돈 장난, 소매 밑, 투기 따위와 인연 짓지 않았다.
꼽아놓고 보니 무능하고 평범한 저희에게는 당연키도 하고 절로 그리 살아질 일이기도 합니다. 잘난 사람들이라도 그리 살면 실수가 없겠다 싶었습니다. 우선 그것부터 배우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되지요?
훈수를 두시는 셈으로 가끔 들려주시는 뜻 깊은 육성을 새겨 듣고 있습니다. 당신의 건강과 평안한 노년을 위해서라도, 늙은 진돗개가 힘겹게 몸 일으켜 짖어댈 일이 우리 마당에서 자주 벌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빕니다.
“나 떠나기 전에 어디서 좋은 개 몇 마리 구해야 할 텐데…” 그런 심정이신지요?
아름다운 노을 뒤에 평안하고 따뜻한 휴식의 밤이 있으시라고 빌겠습니다.
이철수 드림
이철수 / 판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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