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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동시의 시적자아-이상교 동시집 서평

cecil-e 2006. 8. 20. 13:06
 

동시의 시적자아

                                                       -『먼지야 자니?』(이상교 글/산하/2006)



                                                                                                                    오 인 태


  더러 좋다싶은 동시는 있으되, 재미나는 동시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최근, 가뜩이나 지방선거 전후의 암담하고 우울하기 짝이 없는 국면에서 모처럼 실눈을 하며 빙그레 웃도록 만든 동시가 있었으니, 이상교의『먼지야 자니?』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시편들이다.


<원조 떡볶이집> 앞을 지나면서/침이 꿀꺽!/‘떡볶이, 참 맛있겠다!’//<맛있는 빵집> 앞을 지나면서/침이 꿀꺽!/‘팥빵 참 맛있겠다!’//<영주네 만두집> 앞을 지나면서/침이 꿀꺽!/‘통만두, 참 맛있겠다!’//학원 갔다 돌아오는 늦은 저녁 길/침이나 꿀꺽꿀꺽./이러다 내 인생,/다 끝나겠다. -「내 인생」전문


  참 맛깔나는 시이지 않은가. 이처럼 이상교의 동시는 우리에게 은근한 웃음을 머금게 하는 재미를 선사한다. 허허,‘쬐꼬만 놈’이 그깟 떡볶이, 팥빵, 통만두를 못 먹어‘이러다 내 인생/다 끝나겠다니’, 동심이 아니고서는 어림없는 발상이자 표현이다. 그런데 지금 내가‘쬐꼬만 놈’이라고 했겠다. 그건 독자로서 동시의 지은이에게 꼬빡 속아 넘어갔다는 것인데?

  실상, 동시의 화자, 즉 시적 자아는 대개 어린이를 가장한 어른이다. 물론, 어른 자신이 직접 시의 화자가 되는 동시도 있다. 그러나 그건 매우 이례적이고 특별한 경우다. 그래서 나는 동시의 화자를‘대리화자’또는‘의사화자’라고 규정한 바 있다. 동시는 어른이 어린이를 가장하여 동심을 표현하는 시이기 때문이다. 그 가장이 그럴듯할수록 동심을 가진 어린이 독자의 공감대는 넓어지며, 어른 독자들도 깜빡 그 동심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물론 착각이다. 동시의 시적자아가 진짜 어린이인 것으로 착각한다는 말이다. 이 착각이 클수록 독자와 동시의 거리는 좁혀진다. 이쯤에서 문학연구자로서‘이야기가 현실에 대한 착각의 문학이라면, 시는 시적자아에 대한 착각의 문학이 아닐까’하는 학문적 상상력을 발휘해보는 것인데, 글쎄? 그건 자칫 옆길로 샐 수 있는 문제인 것 같으므로 여기서는 밀쳐두기로 하자.

  어쨌든 이상교의 동시는 독자로 하여금‘시적 자아’가 어린이임을 전혀 의심하지 않고, 그 어린이의 마음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묘한 힘이 있다. 그래서 재미있다. 이상교 동시의 특장이자 매력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시인이 동시가 무엇인가를 일찌감치 터득했거나, 스스로가 여전히 동심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래서 이상교의 동시를 읽으면‘아, 이 시인은 천상 동시를 쓰실 분이구나’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실제, 이상교 시인을 <어린이와 문학> 모임에서 딱 한 번 뵌 적이 있는데, 그 연세에도 아랑곳없이‘어린이의 마음을 그대로 지니고 사시는 동시인’으로 느껴졌다.  

  이상교 동시의‘시적자아’들을 만나보자.


눈은 왜/밤사이 내리지?//아, 알겠다!/아침에 창문 열어 본 사람들을/깜짝 놀라게 하려고.//눈은 왜 /밤사이 내리지?//아, 알겠다!/쌓이기도 전에/아이들이 막 밟고 돌아다닐까봐.//눈은 왜/밤사이 내리지?//아, 알겠다!/사락사락/제가 쉬는 숨소리를 조용히 들어보려고. -「눈」전문

 

 ‘고양이는 혼자 무얼 할까?’‘나무로 서있을 적 무얼 보았을까?’‘어디로 날아간 걸까?’‘풀잎 등은 어디지?’‘해님이 나뭇잎에 창을 냈나?’그리고, 이 동시 속의‘눈은 왜 밤사이 내리지?’처럼 이상교 동시의 시적자아는 늘 호기심으로 가득 차있다. 유달리 이상교의 동시에서는 의문형 문장이 눈에 많이 띄거니와, 바로 이 점이 앞에서 얘기한 바대로, 이 시인의 동시의‘시적자아’가 사뭇 어린이다울 수 있는 바탕이지 않을까?

  대개의 동시인들이 쓰는 동시의 문장은 너무 전지적이고, 논리적이고, 그래서 단정적이다. 그건 어른들의 사고방식이자 능력이다. 피아제의 인지발달단계에 따르면 능숙한 추론과 개념적인 사고가 가능한 시기는 우리나이로 치면, 최소한 초등학교 5-6학년쯤, 즉 열 두 세살 이후나 되어야 가능하다. 이때는 이미 어른의 사고와 어린이의 사고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따라서 굳이 어린이문학의 대상을 규정하자면(서구에서는 여전히 동시와 시를 구분하여 창작하지 않고, 어른들이 쓴 시 가운데서 어린이들에게 적합한 시를 고르는 일, 즉‘선시選詩’가 어린이문학의 주된 작업인 것으로 알고 있다.) 유아기부터 초등학교 중학년 이하의 어린이가 되어야한다고 본다. 물론 동시의‘시적자아’도 이 무렵 어린이의 것이어야 한다. 이 시기 어린이들의 그림을‘아동화’또는‘상화’로 치는 것과 같은 이치에서다. 그림의 대가들이 말년에 그리는 사뭇‘상화적인 그림’처럼‘동시’도 혹시 그런 것이 아닐까. 아무튼, 모든 것을 훤히 아는‘전지적 자아’라면 그건 어린이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이상교동시의 시적자아도 단순한 호기심에 그치지 않고, 그 호기심과 궁금증에 대해 내적대화의 방식으로 스스로 답을 내린다. 자칫 상투적일 수 있는 방식이다. 물론 이 때의 시적자아도 시인 자신일 터, 문제는 그 깨달음이‘얼마나 어린이다운 상상력에 따른 것인가’이다.

          

큰이모부는 착하다./나를 혼내지도 않고/일찍 자라고 하지도 않는다.//옷을 벗길 때는/코나 귀가 뒤집히지 않게/조심조심 벗겨 준다./코를 풀게 할 때도/휴지로 코 밑을 세게 닦지 않는다.//아빠보다 돈을 많이 벌어/사 달라는 것을 다/사 줄 거란다.//“그럼, 주희 너 큰이모부 딸 할 거니?”/아빠가 내게 물었다./불쌍한 목소리로.//“생각해 보고요.”/아빠가 울려고 했다. -「큰 이모부」전문

  

  이 동시의 시적 자아는 자못 능청스럽고 짓궂다. 아빠가 울상을 지으며 서운해 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생각해 보고요”라며 능청을 떤다. 그러나 그건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다. 이미 이 동시의 시적자아는 아빠의‘불쌍한 목소리’와‘울상’에  마음이 흔들려‘큰 이모부의 딸이 되지 않겠다.’는 생각을 굳혔을 법하다. 어린이들은 짓궂기는 해도 어른들처럼 모질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이 동시의‘시적자아’는 “생각해 보고요.”라는 말을 통해 자기의 존재감을 스스로 확인함은 물론, 이를 인정해주는 아빠에게 오히려 고마움을 느끼며‘아빠의 딸’일 수밖에 없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새삼 깨닫고 다지게 되었으리라.


작고 귀여운 걸 보기만 하면/우리집 고양이 생각이 난다.//“우리 쪼꼬미만큼 예쁘네!”/속으로 말한다.//친구네 집에 놀러갔을 때/“우리 강아지 예쁘지?”/하고 물으면/웃음이 난다./참으려고 해도 웃음이 난다.//‘야, 우리 고양이하고는/비교도 안된다!’/친구가 속상할까봐/속으로 말한다.//우리 쪼꼬미, 정말이지 예쁘다. -「속으로 말한다」전문


  이상교동시의‘시적자아’는 이처럼 또한 앙큼하다. 이‘앙큼함’은 자기중심적사고와 이를 억제하고자 하는 심리가 동시에 표현되는 행동특성일 것이다. 역시 피아제에 따르면, 이‘자기중심적사고’는 전조작기아동의 행동특성이다. 유치원생이나 초등학교 1학년생이 그린 그림을 보면 산보다도, 집보다도, 나무보다도 자기 자신을 더 크게 그리는데, 바로 이런 사고의 특징을 드러낸 것이다. 최근 몇 년간 ‘아동시의 심리와 시적언어표현특징’을 연구하기 위해 어린이들이 직접 쓴‘아동시’를 1천 편 가까이 모아 읽었는데, 초등학교 1학년 정도의 아동시에서는 분명 자기중심적사고의 특징이 뚜렷이 드러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동시의 시적자아도 자기중심적사고가 퍽이나 강하다. ‘작고 귀여운’모든 것을‘쪼꼬미’로 귀결시켜 버린다. 오죽하면 누가“우리 강아지 예쁘지?”라고 하면 코웃음을 참지 못하겠는가. 시적자아에게‘작고 귀여운 것’으로는 세상에 오로지‘쪼꼬미’밖에 없다. 이 자기중심성이야말로 아동성의 바탕이다. 초등학교 1학년생이 자기 집 고양이를 가지고 시를 썼다면, 아마 여기까지일 것이다. 그러나 이 시의 실제 시적자아는 누구인가? 바로 어른이다. 그래서 단순한 자기중심적 사고에 머물지 않고, ‘친구가 속상할까봐 속으로 말한다.’고 했다. 시인 자신의 자아가 은근히 개입했음을 짐작하게 된다. 그래서 제목도‘ 쪼꼬미’나‘우리 집 고양이’가 아니라 굳이‘속으로 말한다’이다. 아마 어린이가 이 시를 썼다면 십중팔구 제목을‘쪼꼬미’나‘우리 집 고양이’로 했을 터이다. 그럼에도 시인은 그 의도, 즉 교육성을 감추고, 피아제가 말하는‘자기중심적 사고’에다 비고츠키가 말하는‘자기중심적 언어단계’의‘혼잣말’을 구사함으로써 짐짓‘아동성’으로 포장하고 있다. 나는 어린이문학의 문학성이 바로 아동심리와 아동적인 언어표현을 포함하는 이‘아동성’에 있는 것으로 본다. 이상교시인의 어린이에 대한 깊은 이해와 동시적 표현의 노련함이 그래서 예사로 보이지 않는 것이다.  

  어차피 동시창작자가 어린이가 될 수 없는 바에야 이처럼 어린이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아동성(문학성)과 교육성을 배려하여 용의주도하게 시를 형상화하는 능력이야말로 동시창작의 필수적 요건이다. 그래야 독자는 동시의 시적자아가 어린이임을 착각하고 비로소 시적자아와 하나가 되어 자연스레 그 속으로 빠져들 수 있는 것이다. 이 정도면 동시의 창작자나 독자가 어른이든, 어린이이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누구나 동심은 있는 것이므로.

  어른인 내 속에 남아있는 동심의 한 자락을 이상교의 동시 속에 푹 담구고, 짓궂은, 능청맞은, 앙큼한, 그러면서도 천진난만하기 이를 데 없는 그의 시적자아들과 함께 나는 요즘 한 순간이나마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동심이야말로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일지니,

  머리를 쥐어짜며 이 글을 쓰는 일만 없었다면 그 행복감은 더 오래갔을 텐데 말이다.

  -<어린이와 문학> 6월호 서평 원고 


오인태/ 91년『녹두꽃』으로 등단, 『그곳인들 바람불지 않겠나』『아버지의 집』등 시집 몇 권 ․ 『어린이와 문학』등에 동시 발표, 경상대학교대학원 박사과정 문학교육 전공, 현재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진주교대 출강, (사)민족문학작가회의이사 ․ 경남지회장


출처 : 시의 지평
글쓴이 : 松仁 오인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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