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과 동화세상

[스크랩] 포구기행/ 곽재구

cecil-e 2005. 8. 25. 08:55

 

  

  삶이란 때론 상상력의 허름한 그물보다 훨씬 파릇한 그물을 펼때가 있다...... 나는 사람 틈 사이를 비집고 다니며 멸치배의 그물 터는 풍경 속에 내가 지닌 가장 따분하고 어리석었던 시간들을 날려 보냈다.
길 위헤 길게 늘어섰던 차량들아 미안해. 차 속에 앉아 가다서다를 반복하던 눈빛의 사람들 또한 미안해. 당신들이 힘들게 길 위에 앉아 뻥튀기를 먹고 오징어다리를 깨물던 시간들 뒤에 이런 싱싱한 풍경들이 기다리고 있을 줄 몰랐지. 미안해. 어디선가 다시 길게 길게 늘어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다시는 짜증내지 않을거야. 나 또한 그 대열 맨 뒤에 차를 대고 무슨 풍경이 기다리나 꼭 보고 말거야.

 - 동해바다 정자항에서

             

  처음 화포에 들어서던 날, 바다가 배경으로 깔린 그 길 위에서 초등학교 4,5학년 쯤 되어 보이는 아이 둘을 만났다. 둘은 보리피를 불며 걸어가고 있었다...... 몇 십 년이 혹은 그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그것들이 어쩌면 우리들의 삶을 영속시키는 힘인지도 모른다. 보리피리를 불며 아이들은 돌아갈 그리움의 시간이 있다. 그 그리움이 쌓이고 쌓여 아이들은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어떤 힘들고 추한 시간들과 부딪쳤을 때 스스로 그것들을 훌훌 털고 일어설 힘을 지니게도 될 것이다.

- 화포에서


  

  한없이 쓸쓸하고 한없이 포근한...... 언어가 빚어지기 이전의 감정의 바람들이 이승의 시간들을 들쑤시고 지나갔다. 영감 이전의 또 다른 영감의 세계. 소리하는 할머니의 입술에 내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할머니의 윗입술 양쪽에는 길이가 1센티미터는 족히 될 두터운 살점들이 도드라져 있었다. 그 살점들은 심산의 바위처럼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굳어 있어서 할머니의 소리들이 이승으로 첫 나들이를 할 때의 신비한 속삭임을 증폭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할머니의 남편은 할머니가 소리꾼으로 섬 안을 휘돌아다니는 것을 싫어했다. 참혹함이여......


  진도 지산면 인지리 사는 조공례 할머니는

  소리에 미쳐 젊은 날 남편 수발을 서운케 했더니만

  어느날은 영영 소리를 못하게 하겠노라

  큰 돌멩이 두 개로 윗입술을 남편 손수 짖찧어놓았는디

  그날 흘린 피가 꼭 매호송이처럼 송이송이 서럽고 고왔는

  정이월 어느날 눈 속에 핀 조선매화한그루

  할머니 곁으로 살살 걸어와 입술의 굳은 딱지를 떼어주며

  조선매화 향기처럼 아름다운 조선소리 한번 해보시오, 했다더라...

 - 진도 인지리에서


  차를 타고서 어느 낯선 지붕 낮은 집들이 드문드문 밭고랑 사이로 보이는 국도를 달려 본 적이 언제였던가. 노란 장다리꽃 사이로 하얀 배추 나비가 팔랑대며 날아다니는 어느 늦은 삼월을 무료한 햇살을 맞으며 쑥이며, 씀바귀며, 질갱이 같은 나물을 캐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게 하는 책이다.

  ‘과거를 회상하는 버릇은 가슴 안에 깊은 말뚝을 지닌 모든 슬픈 짐승들의 운명 같은 것이다’라고 했던가... 가난하지만 한없이 너그럽고 누구나처럼 생활의 톱니바퀴에 매어살지만 또한 한없이 느릴 수 있는 그런 마음들이 사는 곳을 바라보고 싶다.

2003년 9월 마지막날에



 
가져온 곳: [별에 내린 꽃]  글쓴이: 투하니 바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