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과 동화세상

[스크랩]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이야기를 생각하며 - 이송희

cecil-e 2005. 5. 27. 01:41

옛이야기 들여다보기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이 송 희

1.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이야기를 생각하며

초등학교 3학년에 다니는 조카아이는 학교가 끝나면 늘 엄마 없는 빈집에 혼자 열쇠를 따고 들어간다. 한번은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들어가면 어떠냐고 물었더니 귀신 나올까 봐 무섭다 한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우하하 웃음이 터져나왔다. 나나 아이 엄마는 늘 조카아이가 혼자 있을 때 혹시나 사람한테 피해를 입지 않을까 걱정하는데, 아이는 사람이 무서운 게 아니라 귀신이 무서운 거다. 얼마나 아이다운 생각인가.
우리 옛이야기 ‘해와 달이 된 오누이’를 떠올리면 이런 아이들 심리에 맞아서 오랜 세월 이야기가 이어져 내려오지 않았을까 싶을 때가 많다. 깊은 산 속, 어머니 없는 집에서 아이들만 집을 본다. 낮이나 밤이나 언제 사나운 짐승이 나올지 알 수 없다. 낮에는 그래도 무서운 걸 잊고 서로 어울려 논다. 낮이 지나고 어두움이 깔리기 시작하고, 깊은 산 속 마을에는 금세 어두움이 밀려온다. 달도 없는 깜깜한 밤중, 둘레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호롱불을 피워놓고 어머니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바로 가까이서 들리는 듯한 호랑이 울음소리……. 어젯밤에는 저 윗마을 순이네 아버지가 호랑이한테 물려갔다던데……. 어머니는 언제 오시나. 그런데 문이 흔들리는 소리. 누구세요? 엄마다 엄마! … 그러나 아이들은 호랑이한테 잡아먹히고 만다. 먹고살기 위해 아이들을 홀로 버려 두고 일 나갔다 돌아온 어머니 심정은 얼마나 처참했을까. 자식을 가슴에 묻은 어머니의 한은 하늘을 찌른다. 식구 하나쯤은 사나운 짐승한테 잃었을 옛사람들. 한 해 지은 농사는 물론, 애써 돌본 가축이며 식구들까지 모두 휩쓸어 가 버리는 사나운 자연 앞에서도 사람들은 먹고살기 위해서 한을 가슴에 품고 억척스레 일해야 했을 것이다. 풀어내지 못한 한은 이야기가 되고 노래가 된다. 가진 것을 모두 빼앗아 가고 끝내는 어머니와 아이들을 잡아먹은 호랑이를 죽여 버리고, 가엾은 아이들을 해와 달로 다시 태어나게 만든 우리 옛이야기 ‘해와 달이 된 오누이’는 이렇게 해서 나오지 않았을까.
그러나 ‘해와 달이 된 오누이’가 단순히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사람들의 한만을 담은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호랑이에게 잡아먹히고, 죽임 당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천재지변이나 사나운 짐승 앞에서 목숨을 내놓은 이야기뿐만 아니라 살아가면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많은 일들이 떠올랐을 것이다. 죽은 사람한테까지도 세금을 매기던 때가 있었으니 권력의 횡포는 얼마나 심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일년 내내 농사지어 거둬들이면 그 많은 곡식은 모두 주인 것이 돼 버린다. 산에 들에 풀뿌리를 캐고, 나무껍질을 벗겨 겨우 먹고살지만, 보릿고개를 넘기기가 어디 그렇게 쉬운 일인가. 그런데 권력 가진 자들은 세금을 내라며 그나마 남은 것을 모조리 빼앗아 간다. 온갖 거짓말과 회유와 협박으로 백성들의 목숨 줄을 쥐었다 놓았다 한다. 백성들은 살아남기 위해 거짓말인 줄 뻔히 알면서 한번 더 속아넘어간다. 이번만은 거짓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며. 그러나 마침내 가진 것을 모두 내놓고 이제는 줄 게 없어 목숨까지 내놓아야 한다. 호랑이한테 잡아먹히는 생활보다, 혹독한 정치 속에 죽어 가는 생활이 더 무섭다. 백성들 목숨을 빼앗은 자들은 후환이 두려워 그 자식들까지 없애려 한다.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는 어린아이 목숨까지 빼앗고, 무서워 도망치는 아이들을 끝끝내 뒤따라가 죽이고야 만다. 이 한이 모두 모여 이야기가 된다.
역사의 흐름도 이 이야기를 더욱 간절하게 이어 나가게 했을 것이다. 왕조가 바뀌고, 전쟁이 일어나고, 사회가 혼란스러워질 때마다 백성들은 더욱 고통스럽게 살아가야 한다. 전쟁이 일어나고, 사회에 폭력이 넘쳐나면 여성과 아이들은 더욱 처참해진다. 남정네들은 전쟁에 끌려간 뒤 소식이 없다. 남은 곳에서 생활을 책임지고 살아야 했던 여인네들은 먹고살기 위해 몸까지도 팔아야 했다. 아니 그 이전에 숱한 남성들한테 몸을 빼앗기기도 한다. 속옷까지 내 주고도 모자라 죽임을 당하기 일쑤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사회 한복판에 빨리 내던져지고, 굶주리며, 잔혹한 사회상을 빨리 읽어버린다. 자기 목숨은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 아무도 이들을 돌보지 않는다. 이웃이 있어도 무관심해질 수밖에 없다. 외롭게 홀로 몸부림치다 죽어갈 뿐이다. 현실에서 풀지 못한 한과 간절한 바람은 이야기로 꽃핀다. 이야기에서나마 희망을 찾으려 했던 목숨들은 아이들을 새로운 생명 - 해와 달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

2.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이야기 견주며 살펴보기

어린이 책에서 보는 ‘해와 달이 된 오누이’는 어떻게 재화되었는지 살펴보려고 《한국전래동화》에 나오는 ‘해님과 달님이 된 오누이’(손동인 엮음/대원사), 《남북 어린이가 함께 보는 전래동화 1 - 차돌 깨무는 호랑이》에 나오는 ‘해님과 달님이 된 오누이’(손동인·이준연·최인학 엮음/사계절), 《우리 겨레의 옛날 이야기 1 - 우렁각시 이야기》에 나오는 ‘해와 달이 된 오누이’(신경림 엮음/한길사), 《한국전래동화집 6》에 나오는 ‘해님 달님’(이원수·손동인 엮음/창작과비평사)을 찾아 읽어보았다. 대원사와 사계절에 나오는 두 이야기는 군데군데 한두 낱말이나 어구가 다른 것을 빼고는 이야기 전개나 기술이 똑같아서 같은 사람이 재화한 것으로 보인다. 재화의 완성도에 따라 이야기가 주는 맛은 참 많이 달라진다는 것을 이 책들에 나오는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여전히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네 편을, 구술 채록한 평민사 본(《한국구전설화 1∼12》, 임석재 편/평민사)과 견주어 본다.
《한국구전설화 1∼12》 2·3·5·7·9·10권에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책들 가운데 7권과 9권을 제외한 모든 책에서 같은 화소가 들어간 같은 구조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2·3·5·10권에 나오는 이야기는 ‘해와 달이 된 오누이’ 뜻이 잘 살아서 전달되고 있으며, 이야기 내용은 이렇다. ‘옛날에 깊은 산골에 어머니와 젖먹이 애기, 오누이가 살았다. 하루는 어머니가 품을 팔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호랑이한테 떡, 팔, 다리를 차례로 빼앗기고 마침내 잡아먹힌다. 호랑이는 어머니로 꾸미고 아이들만 있는 집으로 와서 젖먹이 애기를 잡아먹는다. 이걸 보고 오누이는 똥 마렵다며 호랑이를 속이고 방에서 도망 나와 나무 위로 도망간다. 호랑이가 쫓아오자 오누이는 하늘에 빌어 하늘에서 내려 준 동아줄을 타고 올라가고, 호랑이는 오누이를 따라하다 수수밭에 떨어져 죽는다. 오누이는 하늘로 올라가 해와 달이 된다.’

처참하게 망가져 간 백성들 삶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이야기는 크게 어머니가 호랑이한테 잡아먹히는 앞 부분과 호랑이한테서 오누이가 벗어나는 가운데 부분, 그리고 오누이가 하늘로 올라가 해와 달이 되는 마지막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온갖 권력을 다 쥔 호랑이의 힘은 호랑이가 어머니를 잡아먹는 앞 사건에서 환히 드러난다. 이리 저리 빼앗기고, 처참하게 망가져 간 백성들 삶은 어머니가 떡과 옷과 팔 다리를 하나씩 빼앗기고 마침내 호랑이한테 잡아먹히는 것으로 구구절절이 되풀이되면서 나타난다. 어머니가 한 고개 넘을 때마다 호랑이는 더 많은 것, 더 큰 것을 내 놓으라 한다. 많은 옛이야기에서는 이렇게 같은 사건이나 비슷한 사건을 되풀이하여 들려주면서 중요한 일이나 주제를 강조하고 암시한다. 이야기를 듣는 이는 이렇게 같은 사건이 되풀이될 때마다 주인공이 헤쳐나가야 할 험난한 길과 앞으로 다가올 사건을 미리 읽는다. 이 구조를 지루하게 여기고 지나치게 되면 그 힘이 약해진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서도 앞 사건이 되풀이되지 않으면 어머니가 얼마나 모질게 호랑이한테 당하고 잡아먹혔나 하는 것이 강하게 전달되지 않는다. 끊임없이 백성들을 속여 넘기는 지배자의 모습이 강조되지 않는다. 이야기를 듣는 사람도 그만큼 긴장해서 이야기를 들을 수 없기 때문에 어머니로 상징되는 백성들의 처참한 삶을 다 읽어낼 수 없다.
또 되풀이 구조는 이야기 듣는 사람들을 끌어당겼다 풀어줬다 하는 중요한 구실을 한다. 한 사건에서 다음 사건으로 넘어가는 중간중간, ‘이번에는 주인공이 어려움을 헤쳐나가게 되겠다, 아! 아니구나.’ 하며 마음을 놓았다 졸였다 한다. 이처럼 이야기를 듣는 가운데 긴장과 이완이 되풀이되면서 듣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이야기 속으로 한껏 빨려 들어간다. 같은 사건이 되풀이되면서 어느덧 듣는 이도 이야기에 끼여들 수 있게 된다. 이때쯤 되면 들려주는 사람이 일방으로 이야기를 전하고 듣는 이는 가만히 앉아 이야기를 듣기만 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이야기를 만들고 끌어나가는 관계로 발전한다. 그래서 이야기 문화는 삶을 나누는 문화가 된다.
창작과비평사에서 나온 《한국전래동화집 6》 ‘해님과 달님’에서는 일 나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어머니가 고개를 넘을 때마다 호랑이한테 가진 것을 하나씩 빼앗기고 마침내 잡아먹히는 화소가 송두리째 빠져 있다. 다만 어머니로 꾸미고 집으로 들어온 호랑이를 피해 아이들이 나무 위로 올라가는 이야기가 전개되고 난 뒤, 어머니가 호랑이한테 잡아먹혔다는 표현이 나올 뿐이다. 어머니가 호랑이한테 잡아먹히는 처절한 상황을 드러낸 화소가 없으니 이야기의 깊이는 그만큼 줄어들게 된다.

하루는 고개 넘어 부재집이 가서 하루 종일 방아품을 팔구 개떡을 얻어개지구 밤늦게 집이루 돌아오넌데 고개 하나를 넘으느꺼니 범이 나와서 길을 막구 그 개떡을 주문 안 잡아먹갔다구 해서 개떡을 주었다. 범은 개떡을 먹구 어데메루 갔다. 고개를 또 넘으느꺼니 아까 그 범이 나와서 머리에 쓴 수건을 벗어 주문 안 잡아먹갔다구 해서 수건을 벗어 주었다. 그 수건을 개지구 어데메로 가삐릿다.
고개를 또 넘으느꺼니 그 범이 나와서 저고리를 벗어 주문 안 잡아먹갔다구 했다. 낸이 저고리를 벗어 주느꺼니 범은 받아 개지구 어데메루 가삐렀다. 또 한 고개를 넘으느꺼니 범이 또 나타나서 초매를 벗어 주문 안 잡아먹갔다구 해서 초매를 벗어 주었다. 범은 초매를 받아 개지구 가삐릿다. 또 한 고개를 넘으느꺼니 범이 나와서 속곳을 벗어 주문 안 잡아먹갔다구 해서 속곳을 벗어 주었다. 범은 속곳을 받아 가주구 갔다. 또 고개를 넘으느꺼니 범이 또 나와서 팔을 떼어 주문 안 잡아먹갔다구 했다. 낸이 팔을 주느꺼니 범은 팔을 개주구 갔다. 고개를 또 넘으느꺼니 범이 또 나와서 이 낸을 잡아먹었다.(《한국구전설화 2 - 평북편2》, 임석재, 평민사)
*《한국구전설화 1∼12》 2·3·5·6·10권에서 이와 같은 표현이 빠짐없이 나온다.

한편 떡을 팔러 갔던 어머니는 부지런히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떡이 안 팔려 떡광주리가 퍽 무거웠습니다. 어머니가 막 고개를 넘고 있는데 커다란 호랑이가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어머니는 너무도 무섭고 벌벌 떨렸지만 용기를 내어 말했습니다.
“마음 착한 호랑이님, 제발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집에서 어린 아들 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호랑이의 말에 어머니는 얼른 떡을 주었습니다. 호랑이는 떡을 다 먹고 나서 또 말했습니다.
“한 개 더 주면 안 잡아먹지.”
어머니는 또 떡을 주었습니다. 호랑이가 달라고 할 때마다 한 개씩 주다 보니 떡이 하나도 안 남았습니다.
호랑이는 아직도 배가 부르지 않은지 어머니를 먹음직스러운 듯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팔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다리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마침내 호랑이는 어머니를 몽땅 잡아먹고 말았습니다.(《우리 겨레의 옛날 이야기》, 해와 달이 된 오누이, 48쪽)

《우리 겨레의 옛날 이야기》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서는 되풀이가 정확하게 지켜지지 않아 이야기가 맺고 푸는 힘이 약하다. 호랑이는 한 곳에서 어머니가 가진 것을 모두 빼앗아 먹고 어머니를 잡아먹는다. 무사히 한 고개 넘어가면 다시 나타나는 호랑이를 보고 마음을 놓았다 졸였다 하는 기분을 느낄 수가 없다.
평민사 본과 견주어 볼 때 어린이 책에 나온 이야기 네 편에서 나타나는 공통점 하나는 갓난아이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평민사 본에서는 7권만 빼고 산골에 아이 셋과 어머니가 살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2·3·5·6·9·10권) 7권에서도 호랑이가 집에 와서 사람 뼈를 씹어먹는 장면은 나온다. 그런데 살펴본 어린이책 네 편 모두에서는 갓난아이가 아예 나오지 않으니 호랑이가 어머니를 잡아먹고 아이들만 있는 집으로 와서 또 갓난아이를 잡아먹는 곳은 당연히 나오지 않는다. 평민사 본에서는 호랑이가 갓난아이 뼈를 던져 주자 호랑인 줄 알아채고 아이들이 똥 마렵다며 방에서 빠져 나온다. 그런데 갓난아이가 나오지 않는 네 편의 이야기에서는 호랑이 치마 속으로 삐져나온 꼬리를 보고 아이들이 방에서 도망쳐 나온다.

…호랭이는 얼라 젖 먹이갔다 카고 얼라를 보듬고 웃묵에 앉아서 젖먹이넌척 함서 얼라로 잡어묵넌데 뻬로 깨밀어묵니라꼬 오독오독 소리로 냈다. 아그덜이 이 소리로 듣고 엄매야 멀 묵노 날 좀 돌라 캤다. 호랭이는 묵던 얼라 손구락을 덴저 줬다. 아그덜이 이것을 줏어보이 얼라 손구락이여서 이거 오매가 아니고 호랭이다 카고 도망칠라꼬…(《한국구전설화 10 - 경남 편 1》, 118쪽)

“아이고, 내 새끼들아, 얼마나 배가 고팠겠니? 잠깐만 기다려라. 이 엄마가 얼른 밥을 지어 들어갈게.”
이 때였습니다. 오빠가 문구멍으로 내다보니, 부엌으로 걸어가고 있는 것은 어머니의 저고리와 치마를 입은 커다란 호랑이였습니다. 치마 뒤에 기다란 꼬리가 쑥 빠져 나와 있었습니다.…(《한국전래동화》, 손동인 엮음, 대원사, 14∼15쪽)

호랑이가 아무 것도 모르고, 저항할 힘도 없는 갓난아이를 잡아먹는 것은 권력의 무자비한 횡포를 상징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오누이는 상황 판단을 그나마 할 수 있지만 갓난아이는 상황조차 읽을 수 없는 약하디 약한 힘없는 백성의 상징이다. 호랑이가 갓난아이를 잡아먹는 장면은 이것을 강하게 드러낸다. 호랑이가 갓난아기를 잡아먹는 화소는 가장 무섭고 더러운 권력의 모습을 상징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아이들이 보는 이야기로 재화할 때 겉으로 드러나는 잔인함 때문에 이 부분을 빼고 재화했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옛이야기에서 이런 부분을 잔인함으로 읽는 것은 어른들의 관념일 수도 있다. 오히려 이 부분이 빠져서 호랑이는 덜 잔인하게 보인다. 그리고 아이들이 어머니로 변장한 호랑이를 알아채는 데서도 긴박감이 떨어진다. 세부 묘사를 세세하게 하지 않는 옛이야기 특성에 맞추면서 호랑이의 잔인함이 강조되도록 재화하는 방법을 찾아보는 게 좋지 않았을까?

억눌림에서 벗어나려는 백성들의 몸부림
억눌림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있게 마련이다. 옛이야기는 그것을 어김없이 보여 준다. 주인공은 끊임없이 자기를 짓누르는 힘에 맞서 싸우고,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친다. 주인공의 이런 눈물겨운 행동이 되풀이되면서 듣는 이는 주인공이 악에 맞서 이길 수밖에 없는 진실에 눈뜨게 된다. 주인공이 자기 행복을 되찾게 되는 것은 슬기롭고 용감했기 때문이지, 거저 얻은 행운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를 듣는 가운데 절로 깨닫게 된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서 오누이가 호랑이한테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되풀이되는 것을 이 상징으로 읽을 수 있다. 처음에는 그 노력이 헛된 것이 되고 만다. 오누이는 호랑이한테 속아넘어가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속아서 문을 열어 준다. 한번 실패할 때마다 엄청난 희생이 따른다. 호랑이는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는 갓난아기를 그 희생양으로 삼는다. 아이들은 이제 똥 마렵다고 하면서 호랑이한테서 도망쳐 나온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서 오누이가 호랑이한테서 빠져나오려고 똥 마렵다고 하면서 도망쳐 나오는 화소는 어머니와 갓난쟁이 동생을 잡아먹은 호랑이한테서 벗어나려고 아이들이 안간힘을 다하는 것을 보여 준다. 이 화소는 백성들이 권력의 횡포에 맞서 어떻게 슬기롭게 살아남는가 하는 것을 보여 주는 중요한 화소이다. 이 무시무시한 호랑이한테서 벗어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자기가 가진 온갖 슬기와 용기와 힘을 다 모아 저항할 때 비로소 백성들은 억압과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다. 사람살이가 다 그렇다. 한두 번 몸부림치는 것으로 삶이, 정신이 자유로워질 수는 없다. 실패는 되풀이된다. 그러나 거기서 좌절하지 않고 한번 더 일어설 때마다 삶은 더욱 자유로워지고, 꿈꾸는 세상은 가까이 온다.
이 화소는 이야기에서 차지하는 몫이 큰 만큼 듣는 이나 들려주는 이가 잊어버리지 않게 당연히 되풀이되어 나타난다. 구술 채록한 평민사 본에서는 거의 모든 곳에서 이 화소에서 호랑이와 아이들이 나누는 대화가 되풀이되어 나타난다. 처절한 아픔을 몸소 겪고, 거기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쳤던 사람들은 이 하찮은 것 같은 화소가 왜 이렇게 되풀이되는지 절절하게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들려주는 이도, 듣는 이도 이 부분을 중요하게 되풀이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삶에 대한 이해, 상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우리 현대인들은 이 장면을 하찮은 말이나 되풀이되는 곳으로 생각하기 쉬울 것 같다. 아이들이 똥 마렵다고 하자 호랑이가 어디에서 누라 하고 아이들이 다시 대꾸하는 것이 뭐가 그리 큰일인가 싶기도 할 게다. 그러나 옛이야기 화소나 사건 하나 하나에 상징이 숨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부분이 주는 교훈이 그리 만만치 않음을 다시 깨닫게 된다. 작지만 처음으로 아이들이 스스로 온갖 노력을 다해 호랑이에 맞서 이기는 곳이 이곳이기도 하다. 그 통쾌함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것인가. 아이들은 이런 단순한 곳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배워간다. 작은 사건 하나에서도 무엇을 배우고 느낄 것인가 하는 것은 아이들의 몫이다. 그런데 살펴본 어린이 책 세 편에서는 이 장면이 빠져 있고, 《우리 겨레의 옛날 이야기 1》에서는 이 장면이 나오기는 하지만 간단하게 서술되어 있는 것으로 그치고 만다.

… 아그들은 이긋을 집으보고 즈긋은 으매가 아니구 호랭이가 분명하다, 여기 있다가는 잽헤멕히겠다 하구 도망갈 생각으로, “으매 으매, 똥 매르” 했다. “그그다 누으라” “여그 누문 방 안에 쿠린내가 나스 못쓰.” “그름 마룽으다 누으라.” “마룽으다 누면 나가다가 밟으문 안 돼.” “그름 토방에다 누으라.” “토방에다 누문 마룽스 네레오다 밟으면 안 돼.” “그름 마당에다 누으라.” “마당에다 누면 마당이 드르워서 안 돼.” “그름 칙간에 가스 누으라.” “그름 칙간에 가스 누께.” 이러고스 아그들 남매는 밖으로 나와서 칙간에 가는 치하고 그그스 뛰여나와서 … (《한국구전설화 6 - 충남편》, 해와 달이 된 남매, 304쪽) * 거의 같은 표현이 2·3·5·7·9·10권에서도 나온다.

… 오누이는 그제서야 호랑이가 어머니를 잡아먹고 자기들까지 잡아먹으려고 온 것을 알았습니다.
오빠가 꾀를 냈어요.
“얘가 똥을 누고 싶대요. 제가 데리고 갔다 올게요.”
호랑이는 이왕이면 똥을 눈 다음에 잡아먹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라. 얼른 다녀오너라.”(《우리 겨레의 옛날 이야기 1》, 해와 달이 된 오누이, 49∼50쪽, 신경림 엮음, 대원사)

인용한 평민사 본 이야기와 견주면 참 재미없고 싱겁다. 이렇게 되면 아이들이 되풀이되는 사건 속에서 이야기에 자연스레 끼여드는 재미도 앗아버리는 게 된다. 이야기는 어른한테서 아이들한테 일방으로 전달된다. 아이들은 만족감과 성취감을 잃는다. 한번에 이렇게 쉽게 어려움에서 벗어나는 이야기에서 자기 앞길을 헤쳐나가 삶의 주인이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느낄 수가 없다.
이렇게 되풀이되는 곳은 이야기가 간결하게 이어지는 것이 또한 특징이다. 자칫 되풀이가 늘어지면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이 그만큼 줄어들게 된다. 아무리 중요한 사건이라 할지라도 긴장감 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등장인물의 행동만으로 간결하게 전개되는 것이 옛이야기의 특징이긴 하지만, 때에 따라서 또는 들려주는 사람에 따라 이야기에는 옷이 입혀지고 살이 붙는다. 똑같은 이야기라도 상황에 따라 줄어들었다 늘어났다 한다. 그러나 중요한 사건이 되풀이되는 곳에서는 이야기의 흐름을 놓칠 수 없다. 살을 최대한 빼고 뼈대만을 귀에 속속 박히게 들려주어야 했을 것이다. 간결하게, 단순하게 들려주어야 듣는 이도 들려주는 이도 잊어버리지 않는다. 그에 가장 알맞은 구조가 바로 입말만 살려 내는 것이었을 게다. 위에 인용한 구절이 바로 그렇다. “으매 으매, 똥 매르” “그그다 누으라” “여그 누문 방 안에 쿠린내가 나스 못쓰.” “그름 마룽으다 누으라.” “…” … 몇 번을 되풀이해도 지루할 리가 없다. 단순 명쾌하고 재미나게 중요한 사건을 강조하면서 이야기는 쑥쑥 이어진다. 앞서 인용한, 어머니가 호랑이한테 잡아먹히는 화소에서도 간결하게 사건이 되풀이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단순 간결한 되풀이 구조가 이야기에서 갖는 힘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은 우리가 ‘떡 하나 주면 안 잡아 먹지’ 하는 구절 하나만으로도 온전히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이야기는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하고 단순하게 되풀이되는 구절 하나만으로도 오랜 세월 동안 질기게 살아남을 수 있는 강한 생명력을 얻은 것이다.
오누이는 지혜를 짜내어 호랑이한테서 벗어나지만, 다시 한번 실패를 맛본다. 여동생은 호랑이한테 나무에 올라오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이제 오누이는 다시 한 번 위험에 빠진다. 행복은 쉽게 손에 쥘 수 없다는 것을 이 이야기는 너무도 명쾌하게 잘 보여 주고 있다. 쫓길 때로 쫓긴 막바지에 이르러 하늘은 그제서야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사람 힘으로 더 이상 어찌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하늘은 동아줄을 내려 이 불쌍한 오누이를 살려 내는 것이다. 옛이야기에서 주인공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행운을 만나게 되면 어쩌다 거저 얻은 행운으로 주인공이 행복을 찾는다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엄밀하게 읽어내면 까닭 없이 참담하게 살아온 착한 사람들이 하늘의 도움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다. 옛이야기는 ‘사람이면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하는 진리의 세계를 보여 주는 당위의 문학’이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이야기에서도 마찬가지다.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누이는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온갖 노력을 다 한다. 그 힘이 다했을 때 하늘이 도와주는 것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아이들은 이런 이야기 속에서 열심히 애쓴 사람이 복받는다는 것을 느낀다. 혼자 앞길을 헤쳐나가는 것이 어렵지만 내가 가진 힘을 다할 때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도 생긴다는 것을 느끼게 되고, 그래서 서로 도우며 살아가야 한다는 진리에 눈뜨게 된다.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에 대한 백성들의 바람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이야기는 평민사 본에서나 어린이 책 네 권에 나온 이야기에서 모두 오누이가 해와 달이 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어느 곳에서는 오빠가 해가 되고, 누이동생이 달이 되기도 하고(평민사 5권), 어느 곳에서는 그 반대로 되기도 한다(평민사 2권 ‘해와 달이 된 남매’, 3권, 7권, 10권). 또 어느 곳에서는 처음에 오빠는 해가 되고 누이동생은 달이 되었다가 누이동생이 무서워하자 서로 바꾸기도 한다(평민사 2권 ‘해와 달이 된 오누이’, 평민사 9권, 대원사, 사계절, 창작과비평사, 한길사). 이것을 음양의 조화나, 성차별 의식이 들어간 것으로 읽어내기도 하지만, 사실 이 마지막 부분에서 오빠와 누이동생이 저마다 무엇이 되느냐는 그다지 중요한 것 같지가 않다. 오누이가 해와 달이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지.
이 마지막 부분은 주인공이 현실에서 행복을 되찾는 여느 옛이야기의 결말 구조와는 조금 다른 구조라고 볼 수 있다. 아이들은 현실에서 잘 살지 못하고 하늘에서 내려 준 동아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해와 달이 된다. 그렇다고 이 이야기가 패배감이나 절망감이 너무 짙어 이야기에서조차 희망을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옛이야기에서는 언제나 희망을 이야기한다. 때로는 그것을 주인공이 현실에서 행복을 되찾는 것으로 바로 표현하기도 하고, 때로는 은유와 상징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의 결말은 은유와 상징이 두드러진 결말로 볼 수 있다. 짓밟히고 부서진 목숨에 대한 사무친 한은 영원한 삶에 대한 바람으로 이어지고 그 바람을 간절하게 담은 이야기가 바로 ‘해와 달이 된 오누이’이다. 앞 세대는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소리 없이 역사에서 사라졌지만, 다음 세대에서는 앞 세대가 누리지 못한 행복까지 되찾을 수 있기를 백성들은 간절히 바라고 바랐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한 세대의 행운만으로 끝나버리는 것도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내 아들의 아들, 그리고 그 아들의 아들들은 억눌리지 않고 평등한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간절한 바람이 오누이를 해와 달로 다시 태어나게 했을 것이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온 세상 만물을 고루 환히 비추는 해와 달을 바랐던 백성들의 간절한 소망이 드러난 세계. 해와 달이 비추는 곳, 밝은 세상에서는 어느 누구도 신분이나 가진 것으로 차별 당하지 않기를 바랐던 간절한 염원이 담긴 노래. ‘해와 달이 된 오누이’의 결말은 이런 상징들을 담뿍 담은 백성들의 노래이다.


3. 제대로 재화한 ‘해와 달이 된 오누이’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옛이야기에 녹아 있는 것은 인간 보편의 삶과 정서이다. 그 삶과 정서가 상징으로 나타나 있는 여러 화소들을 이해하려면 거꾸로 사람살이를 이해하고 꿰뚫어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시대와 사회가 끊임없이 흘러가고 바뀌지만 자유롭고 열린 삶에 대한 간절한 바람은 언제 어디서나 남아 있게 마련이다. 오늘을 사는 아이들은 오늘의 감각으로 옛이야기를 다시 읽어낼 것이다. 옛이야기에 녹아 있는 상징이나 비유도 그렇게 읽어낼 것이고.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이야기를 오늘을 사는 아이들이 보고 들으면서 지나간 시대 사람들의 삶을 다 떠올리고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 안에서 자신의 모습들을 찾아낸다. 그것을 찾아내는 것은 아이들 저마다의 몫이다. 우리 어른한테는 아이들의 몫이 더욱 풍성해질 수 있도록, 그래서 아이들 삶이 더욱 깊고 넓어질 수 있도록 이야기를 제대로 들려주는 몫이 남아 있다. 옛이야기는 뼈대가 똑같은 이야기를 재화자에 따라 다양하게 재화할 수 있다. 보는 아이들의 나이나 단계에 따라 또 책의 종류에 따라 저마다 다른 맛과 깊이로 재화해 낼 수 있다. 문체나 서술 방식은 이에 따라 여러 모습을 띌 수 있다. 간결하게 전개되는 것이 옛이야기의 핵심이기도 하지만, 살을 많이 입히고 동화 형식으로 다시 썼다고 해서 무조건 옛이야기의 본질이 사라지고, 맛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재화자 저마다 옛이야기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바탕으로 재화하는 태도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단계에 따라 화소를 취하고 버리는 것은 이야기 속에서 가능할 수 있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이야기가 우리 아이들한테 자유롭고 열린 삶에 대한 바람을 키워 주는 좋은 이야기로 굳건히 뿌리내릴 수 있도록, 삶의 진실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이야기로 잘 다가갈 수 있도록 제대로 재화한 이야기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동화읽는어른》2001년 3월호에서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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