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시와 시의 숲...

아직 남은 가을 빛을 보며...

cecil-e 2005. 12. 12. 08:44


맑은 물은 있는 그대로를 되비쳐 준다
만산에 꽃이 피는 날 산의 모습은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 보여 주고
잎 하나 남지 않고 모조리 산을 등지는 가을날은
쓸쓸한 모습 그대로를 보여 준다
푸른 잎들이 다시 돌아오는 날은 돌아오는 모습 그대로
새들이 떠나는 날은 떠나는 모습 그대로
더 화려하지도 않게 더 쓸쓸하지도 않게 보여 준다
더 많이 들뜨지 않고 구태여 더 미워하지도 않는다
당신도 그런 맑은 물 고이는 날 있었는가
가을 오고 겨울 가는 수많은 밤이 간 뒤
오히려 더욱 맑게 고이는 그대 모습 만나지 않았는가

... 맑은 물 / 도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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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와 달, 별까지의
거리 말인가
어쩌겠나 그냥 그 아득하면 되리라.

사랑하는 사람과
나의 거리도
자로 재지 못할 바엔
이 또한 아득하면 되리라.

이것들이 다시
냉수사발 안에 떠서
어른어른 비쳐 오는
그 이상을 나는 볼 수가 없어라.

그리고 나는 이 냉수를
시방 갈증 때문에
마실밖에는 다른 작정은 없어라.

<박재삼 시집> 중 '아득하면 되리라' 전문, 범우사, 2001

사진:풀꽃화가 이현섭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