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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 꽃 / 권태응 (한겨레 / 도종환)
cecil-e
2005. 11. 20. 11:29


감자꽃
-노래마을
자주 꽃 핀건 자주 감자
파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건 하얀 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

- 독립운동가 권태응- / 도종환<한겨레신문>
권태응이란 동요시인이 있다.
「자주 꽃 핀 건 자주 감자 / 파 보나 마나 자주 감자 ...」
이렇게 시작하는 동시 「감자꽃」을 쓴 시인이다.
권태응 시인이 이번 60주년 광복절에 독립운동가로 표창을 받았다.
권태응시인에게 민족의식의 싹을 갖게 해준 사람은
경성제일고보(현 경기고등학교)친구들과 일본인 교사들이었다.
이번에 보훈처에서 찾아낸 당시 경기도 경찰부의
‘사상에 관한 정보철’(경고 특비 제 563호 등의 서류 4부)에 의하면
그들은 일본인 교사가 수학여행 중에나 교무실에서
“조센징 주제에 건방지구나”이런 차별적 말을 하고 구타하거나
모욕하는 말을 들으며 민족적 반항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학교에서 힘써 가르치는 일본식 경례와 예절을 거부하며
그런 교사에게 졸업사진과 앨범을 기증하자는
학급대표의 제의에 강하게 반대한다.
이 논쟁 중에 앨범부원 민병선은
“우리들이 무사히 졸업하게 되는 것은
천황폐하의 홍은과 학교와 가정의 은택(恩澤)”이라고
모범생다운 주장을 펴자 권태응과 친구 7명은
앨범부원들을 졸업식 날 불러내어 집단구타를 한다.
그리고 종로경찰서에 잡혀가 구금당하고
이 소식을 접한 학생들이 거리로 몰려나오자
와다 교장이 수습에 나서게 되고 기소유예처분을 받는다.
학교 당국의 방침에 사사건건 반대하던 이들은
일주일 단위로 모둠일기를 써서 돌려 읽곤 했다.
그 안에는 “학교시험은 20세기의 학생노예제도다”
그런 내용들이 쓰여 있었다. 그때 그들은 고등학생이었다.
제일고보 33회 동창모임인 <33회>라는 빌미결사를 조직하여
<제이빈핍물어> <유물변증법 독본>등의 책을 읽거나
‘허무적 관념의 비판’, ‘지나사변의 전도’
‘일본자본주의의 여러 문제’등의 주제를 토론하기도 한다.
그들은 “제국주의 국가들끼리의 교전이 다대한 물적 인적
손해를 입고 무너질 것이며, 조선이 일본제국주의 고리로부터
이탈 독립할 것에 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도 나눈다.
그러다가 1939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수가모 형무소에 수감된다.
그리고 연식 정구를 좋아하던 건강한 사람이 감옥생활 일 년만에
폐병 3기의 몸이 되어 병보석으로 출옥하게 된다.
1940년 5월 14일 출소한 뒤 도오쿄오 시내 제국갱신회에
거주지를 제한당하고 와세다 대학에서는 퇴학을 당한다.
병든 몸으로 돌아와 인천에 있는 적십자 요양원에서
치료를 하다 고향으로 돌아와 야학을 하고 이 무렵부터
동시를 쓰기 시작하여 1948년 『감자꽃』이란 동시집을 내게 된다.
그러나 6.25 전쟁이 터져 피난 가는 길에 약도 못 쓰고
그만 34살의 젊은 나이에 죽고 만다. 전쟁 중이라 모친이
다락에 있는 선반을 뜯어 거기에 시인을 모셨다고 한다.
아직도 293편의 아름다운 유고 동시가 미국에 있는 아들(권영함) 집에
빛을 보지 못한 채 보관되어 있다.
일본정부는 우리 정부가 요청한 권태응의 재판관련 기록이나
판결문에 대해 확인불가라는 답변만 보내왔고 나도 알 년 넘게
와세다 대학에 있는 후배교수를 통해 권태응 시인관련 자료를 찾았지만
2차 대전 A급 전범이 수용되어 있다 처형된 도오쿄오의 수가모형무소는 해체하고
자료는 전국으로 분산해 버려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은 그 자리에 선샤인 빌딩을 지었다고 한다.
선샤인. 일장기 안의 붉은 태양, 그 태양의 이미지를 팔고 있는 거대한 빌딩.
그런 거대함으로 감춰 버리고 싶고, 확인해 주고 싶지 않은 것들이
일본은 아직도 많은 것 같다. 그러나 해를 됫박으로 가릴 수는 없을 것이다.
아직도 자료를 찾지 못하는 독립운동가의 삶이나 감춰진 흔적이
얼마나 많이 역사의 어둠 속에 묻혀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