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른한 일상의 하루..
함께 피는 봄
cecil-e
2021. 3. 19. 22:26





단발머리 여중생이 되던 그해 봄.
교실 문이 열리고 하얀 배꽃을 닮은 국어 선생님은
창가에 내려앉은 햇살처럼 눈부시게 왔다.
긴 생머리에 화장기 없는 맑은 얼굴.
입꼬리만 살짝 올리며 웃는 표정은
어쩐지 외롭고 쓸쓸해 보였지만,
우리에겐 선생님의 자잘한 그 모든 것들이 다 신비로움이었다.
그날부터 짝사랑이 시작되었고
선생님은 콩닥거리는 내 가슴에 노란별로 내려앉았다.
선생님이 알려 준 소설책을 찾아 읽고
연습장에 시를 베껴 쓰며 선생님의 얼굴을 수도 없이 그리고 지웠다.
국어 시간만 기다렸다.
선생님이 시를 읽어주며 내 자리 옆을 지날 때
하얀 남방에 걸려있는 긴 머리카락을 살짝 떼어내
책갈피에 넣고서도 얼마나 행복했던지.
그런데 꿈같은 일이 벌어졌다.
선생님이 교무실로 오라시는 것이다.
“이거 선생님이 좋아하는 책인데…. 받아. 책 많이 읽고.”
노란 종이로 싼 책은 생떽쥐페리의 어린왕자였다.
‘선생님이 내 짝사랑을 알아채신 걸까?
사랑하면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다는데
내 마음을 읽어버린 걸까?
난 그냥 제비꽃처럼 작게 웃기만 했는데….’
기쁨의 언덕에서 해해거리기도 잠시
선생님은 결혼과 함께 전근을 가셨고
서운함을 전할 겨를도 없이 하얀 이별을 했다.
그 다음해 플라타너스 이파리가 무더기로 교정에 나뒹굴 때
하늘의 별이 되었다는 소식이
아침 조회 운동장을 눈물비로 적셨다.
내 노란별은 기억의 창고에 갇혀
녹슬기 시작했고 이따금씩 반짝이다 사라지곤 했다.
그렇게 선생님은 내게
봄날 배꽃 향기 살짝 내려놓고
아련한 그리움의 강 너머로 떠나셨다.
여러 해 지나면서 봄의 짝사랑을 떠올릴 땐
내 꿈은 바람을 타고 산책을 한다.
그때마다 녹슬었던 그리움의 더께를
조심스레 벗겨내면 내 노란별은 다시 반짝거리고
어린왕자로 온 선생님은 가만히 속삭인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마음으로 보는 거야.
사랑만 있음 다 보여.”라고.
꿈의 산책로는 어른이 된 지금도
여전히 마법처럼 나를 어른아이로 멈추게 한다.
수업을 할 때 아이들을 동화책으로 만나고
풍선을 들고 뛰노는 모습을 색연필로 그리며
심장 발전소는 점점 더 쿵쾅거리니 말이다.
어쩌면 선생님의 노란별이 바람 불고
비 맞아도 언제나 내 가슴속에서 반짝이기 때문이리라.
갑자기 얼굴이 발개지고 가슴이 뜨거워진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이 시처럼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을 자세히 보고 오래 보았는지….
다시 또 봄이다.
산수유 노랗게 올라오면
담장마다 개나리 방글방글 웃을 테고
복사꽃 화르르 떨어지면 선생님은 그해 봄날로 오시리라.
문득 떠오르는 봄노래를 입속으로 웅얼대며 창문을 연다.
“꽃 한 송이 피었다고 봄인가요.
다 함께 피어야 봄이지요.”
‘그리움의 힘’ 하나만 있어도
삶이 봄이듯이 하얀 배꽃 닮은 선생님처럼
나도 아이들과 함께 피고 싶다.
